이 연구원에게 물어보니 그가 연구했던 조선 자기 중에 제작자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17세기 철화·동화백자는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연이어 겪은 후 청화 안료를 구하기 힘들어졌을 때 나타난 것이다.조선 도공들은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지니고도 익명의 존재로 머물렀다.
조선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조선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도공을 대우해 이름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조선의 도자기와 채색 백자는 이미 15세기에 유명했고.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다.그래도 그는 조선인은 훌륭한 본성 때문에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더욱이 백자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12세기에 벌써 서적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그가 구한말 한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과 일본의 문화 격차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문소영 기자 전시에선 백자의 다채로움이 빛난다.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현대미술가 작품 같네.
이토록 매력적인 백자를 만든 도공들의 이름을 전시장에서 볼 수 없다.현대미술 뺨치는 창의적 작품 빼어난 작가들 익명 속에 묻혀 상공업 경시한 주자학의 폐해 예술을 국부로 연결하지 못해 일본엔 이름 남긴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 되기도 리움미술관 백자전 ‘군자지향 화제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준광 책임연구원은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